[들이 짓는 교육] 글손실 걱정은 없는데 — 빌려온 언어를 살아내는 일

2026-07-06

상큼함은 점점 사라지고, 일상에 절여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난 <들을 짓는 교육>에서는 기세있게 ‘못한다고 미리 선을 긋지 않으려 한다.’고 썼었는데, 자꾸만 선을 긋고 싶어지는 요즘이네요. 교육을 하다 보면 잘 마무리되는 날도, 스스로 ‘망했다’ 생각되는 순간도 있잖아요. 저는 그 망한 교육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교육가로서 성찰은 해야겠고, 그렇다고 너무 깊이 빠지지 않게 정신승리도 해야겠고. 복잡합니다 마음이. 


무책임해지자는 게 아니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어쩌라고’의 마음은 어떻게 더 잘 가질 수 있나요? 이번 글에는 꼭 들에 온 뒤에 생긴 고민은 아니었지만, 들에 오고 나서 더 많이 고민되는 질문을 들고 왔습니다. 



나는 정말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가끔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교육에서는 존중을 이야기하고, 반(反)차별을 이야기하고,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서로의 다름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때로는 교육에서 만난 누군가의 삶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는 사실에 오래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육을 마치고 혼자 남으면 문득 ‘내가 그런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살아내지 못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날도 있고, 편견을 품은 채 지나친 순간도 있고, 관계 앞에서 서툴기만 했던 날도 있습니다. 교육에서 말한 것과 내가 살아가는 방식 사이의 간극을 마주할 때면, 교육을 하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내 삶으로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말을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회피하기 위해 언어보다 적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하고 말입니다. 



자기 언어를 뽐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 


5-6년 전 다른 단체에서 만난 한 활동가에게 “어떤 시간을 보내면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 활동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활동하면서 가진 언어는 내 것이 아니다.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그때는 이 말을 너무 겸손하다고 생각하며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활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온 언어를 배우고, 따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내 언어가 생기겠지.’ 그때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지고,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언어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오래도록 완벽한 정답을 갈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능력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내 언어'를 갖고 싶다는 마음도 어쩌면 순수한 고민만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더 잘 말하는 사람, 더 설득력 있는 사람, 더 관점 있는 교육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해 온 일은 늘 비슷했습니다.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이 오래 고민해 온 언어를 배우고, 청소년과 장애인의 삶을 만나며 그들의 삶이 말하는 이야기를 오래 듣고,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혼자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삶에서 시작된 언어를 이어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들'은 글손실1)을 걱정할 일은 없는 조직입니다. 제 기준에 비추어 너무 많은 글을 읽습니다. 보고서를 읽고, 토론문을 읽고, 발행물을 읽고.. 누군가 오래 고민하며 만든 문장들을 통해 활동의 역사와 언어를 배우는 일이 일상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내 언어가 아니다', ‘내 언어를 갖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인권교육에서 말하는 언어는 과연 누구의 것이어야 할까요? 온전히 나 혼자 만들어 낸 말이어야만 자기 언어일까요.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만나고, 그 삶이 만들어 낸 언어를 오래 품고 살아낸 끝에 몸에 밴 말도 자기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하겠죠. 그럼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필요한 훈련은 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는 여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놓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오래 읽고, 기록을 오래 품고, 그것이 내 몸에 밸 때까지 기다리는 훈련보다, 내 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교육은 자기 언어를 뽐내는 일이 아니라고, 누군가의 삶이 만들어 낸 언어를 함부로 자기 것인 양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잊어버리지 않는 일. 그 삶이 만들어 낸 언어를 또 다른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는 일. 기록을 읽는 데서 시작하지만, 결국 사람을 읽는 일. 그리고 그 삶이 품고 있는 언어를 다음 사람에게 이어 주는 일. 바로 그 일을 잘해낼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 훈련. 기록을 읽는 훈련.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훈련. 어쩌면 인권교육은 그런 훈련을 멈추지 않는 사람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자신이 없기도 한데요. 



누군가의 언어에 기대어 살아내는 중 


얼마전, 동료들의 언어를 빌려쓰고 있다고 말했던 활동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는 지금도 그리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이 고민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경험이 쌓였고, 같은 문장을 말하더라도 이제는 그 문장이 자신의 삶을 한 번 통과한 뒤 나오는 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빌려온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 빌려온 언어를 소화하는 것도 시간이 드는 일이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 그 언어를 살아내는 중이었던 것은 아닐까. ‘차라리 잘 따라하면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전히 교육을 마치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지만, 그 부끄러움은 이제 예전과 조금 다릅니다. 완벽하게 살아낸 뒤에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계속 말하고, 배우고, 다시 살아보는 과정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한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언어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동료들의 언어에 기대고, 앞선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 기대고, 무엇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제가 채우고 싶은 것은 단순 말과 글이 아닙니다. 그 글을 쓰게 만든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이 만들어 낸 언어입니다. 그리고 예전보다 조금 더, 그 언어를 내 몸으로 살아내고 싶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된 활동가가 제게 건넨 과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하는 활동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내가 다루는 의제는 무엇이고, 그 의제가 내 주변, 활동의 영역 바깥의 사람들, 그리고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계속 정리해 보는 것.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의 삶에 기대어, 또 어떤 연결을 붙들며 인권교육을 하고 계신가요?



1) 글손실 : 글자를 읽지 않았을 때 몸에서 글이 빠져나가는 현상. 또는 그런 상태. 

301a1036194ff.png출판사 김영사가 헬스 콘셉트 프로젝트인 '짐영사(GYM영사)'를 통해 "운동을 안하면 근(근육) 손실이 오듯, 책을 안 읽으면 글(문해력) 손실이 온다"는 밈을 담아낸 한정판 굿즈래요. (사진출처 : X @meomketer) 


글쓴이 | 유리(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