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평범했던 일상을 한순간에 흔들고 부수고 태운다. 소중한 무언가를 여지없이 앗아가고, 세상이 안전하다는 믿음마저 무너뜨린다.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때론 딛고 설 바닥조차 없는 아득한 절망이,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알 길 없는 무수한 질문이, 더는 안부를 나누기 힘든 깨져버린 관계가 기다린다.” – 인권교육센터 들, <폐허 속에서, 기어이: 엮이고 엮은 공동체 이야기>
지난해 말, ‘들’에서 펴낸 <폐허 속에서, 기어이> 서문에 실은 글입니다. 읽다 보면 목울대가 조여오곤 하는 이 문장들은 재난 피해자를 직접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알지도, 쓸 수도 없었을 이야기일 거예요.
재난기록 워크숍, 기획하기와 질문을 연마하다
지난 1월 ‘들’은 재난인권에 관한 온라인 강좌에 이어, 재난기록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오프라인 워크숍을 개최했습니다. 없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재난은 매년 다양한 얼굴로 우리의 곁을 찾아옵니다. 미리 훈련된 기록자들이 많을수록 재난의 기억이 흩어지지 않도록 할 기록활동도 강화될 수 있고, 그래야 사회도 피해자의 언어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열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1월 30일에 개최된 재난기록 역량강화 워크숍. 참여자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기록 역량강화 워크숍은 재난기록에서 구술기록이 가진 의미를 살피고, 기록 작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초점/시점/관점’을 익히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역량을 기르는 시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참여자들과 함께 재난의 시점에 따라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기록할 것인지를 직접 기획해보기도 하고, 구술자는 말하기를, 기록자는 질문하기를 망설이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말하기와 듣기의 공동체’를 엮어가는 자세를 짚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터뷰의 핵심인 ‘좋은 질문’을 찾아보는 연습 시간에 대한 참여자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이미 있는 구술 기록 가운데 일부를 보여주고, 기록자로서 이어가고 싶은 질문이나 보태고픈 이야기를 찾아보는 시간이었는데요.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구술자는 다른 마음의 방을 열게 되고, 어떤 이야기를 보태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깊이도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구술 기록의 일부를 보고 대화를 이어갈 질문이나 이야기를 궁리해보는 활동지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찾은 다음에는, 실제 구술기록에 담긴 당사자의 이야기와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록집에는 참여자들이 찾은 질문에 대한 응답이 담겨 있기도 하고, 담겨 있지 않기도 합니다. 담기지 못한 까닭은 기록자가 미처 질문하지 않아서일 수도, 질문했지만 피해자가 차마 답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놓쳐버린 질문’을 되짚어 보는 과정은 더 좋은 인터뷰를 위한 다짐으로 이어졌고, ‘아직은 말할 수 없음’을 만드는 장벽을 떠올려 보는 과정은 우리가 함께 깨야 할 사회적 과제를 환기해 주었습니다. 이 연습을 통해 인터뷰의 핵심이 피해자의 마음을 응원하고 더 깊은 대화로 초대함으로써 당사자의 서사화를 지원하는 일임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권교육활동가가 구술기록에 나선 까닭
인권운동이 구술기록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는 2013년 밀양 765KV송전탑 반대 대책위로부터 주민 구술 프로젝트를 제안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그 결과물인 <밀양을 살다>가 출판될 즈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시민기록위원회가 구성되고 재난기록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 참사뿐 아니라 수해, 산불과 같은 재난 현장에 대한 기록도 늘고 있습니다. ‘들’의 활동가들도 ‘밀양 구술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활동, 지난해 재난공동체 사례집 발간까지 꾸준히 재난기록 활동에 참여해 왔습니다.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들이 참여한 재난 구술기록물들
인권교육활동을 하는 우리가 재난기록에 뛰어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전에도 피해 당사자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인권실태를 보고하는 활동을 이어오긴 했지만, 구술기록 활동은 좀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참혹한 재난 현실 앞에 놓인 피해자들을 바라보며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마음에서 출발한 우리는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발생 일시, 피해 규모와 같은 숫자로 기록되는 사실들 못지않게, 피해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재난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요. 구술기록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정당한 무게를 부여하는 일임과 동시에, 재난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록활동은 인터뷰와 원고 집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재난 피해자 단체와의 유기적 연대 속에서 사회적 서사를 만드는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사회가 공유하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면 재난의 진실에 관한 기억은 쉽게 휘발되고, 재난의 반복을 막을 교훈도 형성될 수 없습니다. 연구자 김명희의 말처럼, 다른 재난과 달리 세월호참사에서 지속적인 시민연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된 슬픔과 분노를 공유한 감정적 유대가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대안적인 가치의식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김명희(2017), 「국가에 대항하는 가족 : 세월호 연대의 감정동학과 루트 패러다임」, 《탐라문화》 No.56). 발생한 재난에 대한 비탄과 분노가 사회공동체 내부에 ‘침투’하고,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의 애도로 ‘발전’하는 데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 가능한 서사로 만들어낸 기록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권교육과 기록활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구술을 기록하다 보면, 말하고 듣고 질문하고 다시 말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의 권한 강화라는 인권교육과 많이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자기 경험을 재구조화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인터뷰 과정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인권교육이 되는 셈이지요. 인터뷰를 통해 채집된 당사자의 목소리는 재난과 재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반격하는 강력한 증거로 사회의 인권의식을 깨우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요. 우리가 인권교육운동의 일환으로서 기록활동에 참여하는 이유이면서, 더 많은 이들이 기록활동에 관심을 이어가길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글: 개굴(배경내, 상임활동가)
지난해 말, ‘들’에서 펴낸 <폐허 속에서, 기어이> 서문에 실은 글입니다. 읽다 보면 목울대가 조여오곤 하는 이 문장들은 재난 피해자를 직접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알지도, 쓸 수도 없었을 이야기일 거예요.
재난기록 워크숍, 기획하기와 질문을 연마하다
지난 1월 ‘들’은 재난인권에 관한 온라인 강좌에 이어, 재난기록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오프라인 워크숍을 개최했습니다. 없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재난은 매년 다양한 얼굴로 우리의 곁을 찾아옵니다. 미리 훈련된 기록자들이 많을수록 재난의 기억이 흩어지지 않도록 할 기록활동도 강화될 수 있고, 그래야 사회도 피해자의 언어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열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1월 30일에 개최된 재난기록 역량강화 워크숍. 참여자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기록 역량강화 워크숍은 재난기록에서 구술기록이 가진 의미를 살피고, 기록 작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초점/시점/관점’을 익히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역량을 기르는 시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참여자들과 함께 재난의 시점에 따라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기록할 것인지를 직접 기획해보기도 하고, 구술자는 말하기를, 기록자는 질문하기를 망설이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말하기와 듣기의 공동체’를 엮어가는 자세를 짚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터뷰의 핵심인 ‘좋은 질문’을 찾아보는 연습 시간에 대한 참여자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이미 있는 구술 기록 가운데 일부를 보여주고, 기록자로서 이어가고 싶은 질문이나 보태고픈 이야기를 찾아보는 시간이었는데요.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구술자는 다른 마음의 방을 열게 되고, 어떤 이야기를 보태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깊이도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구술 기록의 일부를 보고 대화를 이어갈 질문이나 이야기를 궁리해보는 활동지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찾은 다음에는, 실제 구술기록에 담긴 당사자의 이야기와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록집에는 참여자들이 찾은 질문에 대한 응답이 담겨 있기도 하고, 담겨 있지 않기도 합니다. 담기지 못한 까닭은 기록자가 미처 질문하지 않아서일 수도, 질문했지만 피해자가 차마 답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놓쳐버린 질문’을 되짚어 보는 과정은 더 좋은 인터뷰를 위한 다짐으로 이어졌고, ‘아직은 말할 수 없음’을 만드는 장벽을 떠올려 보는 과정은 우리가 함께 깨야 할 사회적 과제를 환기해 주었습니다. 이 연습을 통해 인터뷰의 핵심이 피해자의 마음을 응원하고 더 깊은 대화로 초대함으로써 당사자의 서사화를 지원하는 일임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권교육활동가가 구술기록에 나선 까닭
인권운동이 구술기록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는 2013년 밀양 765KV송전탑 반대 대책위로부터 주민 구술 프로젝트를 제안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그 결과물인 <밀양을 살다>가 출판될 즈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시민기록위원회가 구성되고 재난기록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 참사뿐 아니라 수해, 산불과 같은 재난 현장에 대한 기록도 늘고 있습니다. ‘들’의 활동가들도 ‘밀양 구술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활동, 지난해 재난공동체 사례집 발간까지 꾸준히 재난기록 활동에 참여해 왔습니다.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들이 참여한 재난 구술기록물들
인권교육활동을 하는 우리가 재난기록에 뛰어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전에도 피해 당사자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인권실태를 보고하는 활동을 이어오긴 했지만, 구술기록 활동은 좀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참혹한 재난 현실 앞에 놓인 피해자들을 바라보며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마음에서 출발한 우리는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발생 일시, 피해 규모와 같은 숫자로 기록되는 사실들 못지않게, 피해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재난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요. 구술기록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정당한 무게를 부여하는 일임과 동시에, 재난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록활동은 인터뷰와 원고 집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재난 피해자 단체와의 유기적 연대 속에서 사회적 서사를 만드는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사회가 공유하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면 재난의 진실에 관한 기억은 쉽게 휘발되고, 재난의 반복을 막을 교훈도 형성될 수 없습니다. 연구자 김명희의 말처럼, 다른 재난과 달리 세월호참사에서 지속적인 시민연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된 슬픔과 분노를 공유한 감정적 유대가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대안적인 가치의식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김명희(2017), 「국가에 대항하는 가족 : 세월호 연대의 감정동학과 루트 패러다임」, 《탐라문화》 No.56). 발생한 재난에 대한 비탄과 분노가 사회공동체 내부에 ‘침투’하고,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의 애도로 ‘발전’하는 데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 가능한 서사로 만들어낸 기록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권교육과 기록활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구술을 기록하다 보면, 말하고 듣고 질문하고 다시 말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의 권한 강화라는 인권교육과 많이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자기 경험을 재구조화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인터뷰 과정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인권교육이 되는 셈이지요. 인터뷰를 통해 채집된 당사자의 목소리는 재난과 재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반격하는 강력한 증거로 사회의 인권의식을 깨우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요. 우리가 인권교육운동의 일환으로서 기록활동에 참여하는 이유이면서, 더 많은 이들이 기록활동에 관심을 이어가길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글: 개굴(배경내,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