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거주시설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수없이 ‘인권’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인권기반, 인권감수성, 인권실천…. 그러나 정작 그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인권은 늘 공기 중에 떠도는 말처럼 들렸고, 그 단어를 붙잡기엔 현장은 늘 너무 바빴다. 교대근무 전 일찍 출근해 교육을 듣거나, 퇴근도 못한 채 연장근무수당을 받으며 억지로 앉아 있어야 하는 교육. 그 안에서 “인권”은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의무였고, 종종 “인권 때문에 일을 못 한다”는 푸념이 나올 만큼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인권교육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실체 없이 떠도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감각하고 인정하는 시간으로. 세계인권선언이나 장애인권리협약의 조항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왜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함께 묻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권교육을 위해 모여 앉은 이유를 ‘공동감각’을 기르는 일이라 한다. 인권기반의 사회복지 실천, 그리고 사회복지 노동 인권 실현은 한 사람의 감각과 제기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감각하는 이가, 의견을 내고자 하는 이가 많아질수록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1년에 한 번이라도 모여 감각의 씨앗을 틔워야 한다는 말로 교육을 시작한다.
나는 교육에서 인권의 역사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인권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의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며 점차 확장되어 온 개념이고, 이것은 사회복지의 이념과도 닮아 있다. 사회복지 역시 시대마다 새로운 위험과 불평등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확장해온 역사다. 단순히 존중하거나 배려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자 선의로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은 선의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권리를 함께 보장하고 옹호하는 일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인권교육은 ‘좋은 마음’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권리는 힘과 권력에 의해서 지워지거나, 없었던 것처럼 침묵하길 강요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감각과 포착의 시간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권교육은 여전히 협의적이다. 기관에서 강의를 의뢰할 때조차, 담당자가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1년에 한 번씩 듣는 교육임에도 인권은 무엇인지, 인권에 대해 어떤 것들을 듣고 싶은지를 그려보는 것조차 막막하다는 것, 사회복지 기관의 주 이용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권 이슈 외에는 폭넓게 듣거나 감각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장애인거주생활시설의 종사자라면 장애인 인권만, 노인복지시설이라면 노인 인권만 다루는 식이다. 그러나 인권은 그렇게 분절된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서로를 감각하는 관계망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를 집어내어 그 정체성으로만 살라고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은 여전히 정체성 중 하나를 집어내어 그것만을 바라보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정의를 함께 시도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랬다”, “지원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말들 뒤에는 종종 그 사람의 존엄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채 묻히는 상황이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이고, 지원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선의와 헌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숨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인권교육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인권교육은 때로 갈등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설과 탈시설을 둘러싼 논의 속에서, 언론은 서로를 대립적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속에서 ‘적’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지원 인력의 부족, 예산의 한계, 물리적 환경의 제약 속에서도 장애인의 일상을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탈시설을 염원하는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설에서부터 그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인권교육이 이러한 경험과 감정이 만나는 연결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의 처지와 맥락을 이해하며, 적대 대신 대화로 관계를 이어가는 시도. 그것이 내가 교육을 통해 가장 소망하는 일이다. 그 대화 속에서 나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권을 가진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람’의 자격은 언제나 불평등하게 부여되어 왔다. 장애라는 정체성이 그 사람의 전부로 취급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 또한 존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현장의 종사자들은 인권기반의 실천을 원하지만, 정작 그 길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다. 인력난과 예산 부족, 물리적 한계 속에서 때로는 권리를 제한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종사자들은 죄책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흔들린다. 나는 교육을 통해 그 감정을 체념으로 두지 않으려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할까?”라는 의구심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인권교육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 믿는다.
결국 내가 꿈꾸는 인권교육은 ‘불친절한 인권’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모두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친절한 말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함께 질문하고 다시 감각하는 시간. 그 불친절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이야말로, 내가 인권교육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 글쓴이: 여름 (활동회원)
장애인거주시설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수없이 ‘인권’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인권기반, 인권감수성, 인권실천…. 그러나 정작 그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인권은 늘 공기 중에 떠도는 말처럼 들렸고, 그 단어를 붙잡기엔 현장은 늘 너무 바빴다. 교대근무 전 일찍 출근해 교육을 듣거나, 퇴근도 못한 채 연장근무수당을 받으며 억지로 앉아 있어야 하는 교육. 그 안에서 “인권”은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의무였고, 종종 “인권 때문에 일을 못 한다”는 푸념이 나올 만큼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인권교육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실체 없이 떠도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감각하고 인정하는 시간으로. 세계인권선언이나 장애인권리협약의 조항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왜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함께 묻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권교육을 위해 모여 앉은 이유를 ‘공동감각’을 기르는 일이라 한다. 인권기반의 사회복지 실천, 그리고 사회복지 노동 인권 실현은 한 사람의 감각과 제기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감각하는 이가, 의견을 내고자 하는 이가 많아질수록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1년에 한 번이라도 모여 감각의 씨앗을 틔워야 한다는 말로 교육을 시작한다.
나는 교육에서 인권의 역사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인권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의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며 점차 확장되어 온 개념이고, 이것은 사회복지의 이념과도 닮아 있다. 사회복지 역시 시대마다 새로운 위험과 불평등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확장해온 역사다. 단순히 존중하거나 배려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자 선의로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은 선의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권리를 함께 보장하고 옹호하는 일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인권교육은 ‘좋은 마음’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권리는 힘과 권력에 의해서 지워지거나, 없었던 것처럼 침묵하길 강요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감각과 포착의 시간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권교육은 여전히 협의적이다. 기관에서 강의를 의뢰할 때조차, 담당자가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1년에 한 번씩 듣는 교육임에도 인권은 무엇인지, 인권에 대해 어떤 것들을 듣고 싶은지를 그려보는 것조차 막막하다는 것, 사회복지 기관의 주 이용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권 이슈 외에는 폭넓게 듣거나 감각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장애인거주생활시설의 종사자라면 장애인 인권만, 노인복지시설이라면 노인 인권만 다루는 식이다. 그러나 인권은 그렇게 분절된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서로를 감각하는 관계망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를 집어내어 그 정체성으로만 살라고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은 여전히 정체성 중 하나를 집어내어 그것만을 바라보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정의를 함께 시도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랬다”, “지원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말들 뒤에는 종종 그 사람의 존엄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채 묻히는 상황이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이고, 지원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선의와 헌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숨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인권교육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인권교육은 때로 갈등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설과 탈시설을 둘러싼 논의 속에서, 언론은 서로를 대립적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속에서 ‘적’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지원 인력의 부족, 예산의 한계, 물리적 환경의 제약 속에서도 장애인의 일상을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탈시설을 염원하는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설에서부터 그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인권교육이 이러한 경험과 감정이 만나는 연결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의 처지와 맥락을 이해하며, 적대 대신 대화로 관계를 이어가는 시도. 그것이 내가 교육을 통해 가장 소망하는 일이다. 그 대화 속에서 나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권을 가진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람’의 자격은 언제나 불평등하게 부여되어 왔다. 장애라는 정체성이 그 사람의 전부로 취급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 또한 존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현장의 종사자들은 인권기반의 실천을 원하지만, 정작 그 길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다. 인력난과 예산 부족, 물리적 한계 속에서 때로는 권리를 제한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종사자들은 죄책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흔들린다. 나는 교육을 통해 그 감정을 체념으로 두지 않으려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할까?”라는 의구심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인권교육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 믿는다.
결국 내가 꿈꾸는 인권교육은 ‘불친절한 인권’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모두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친절한 말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함께 질문하고 다시 감각하는 시간. 그 불친절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이야말로, 내가 인권교육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 글쓴이: 여름 (활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