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취약성을 혐오하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2025-11-02


20250930단체사진


요즘 돌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들에서 ‘움돌(움직이는돌봄과인권)’팀 활동도 함께하고 있고, 그동안의 삶을 ‘돌봄’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돌아보고 해석하고 고민을 보태어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올해 들어 돌봄을 주제로 한 여러 교육과 워크숍 등에 자연스럽게 이끌렸어요. <2025 온라인 고개넘기 워크숍 : 돌보는 질문, 질문하는 돌봄>에도 그렇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청소년을 사랑하고 보호(돌봄)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만큼 그 사랑과 돌봄이 어때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없습니다. 어린이·청소년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주체가 되기보다는 ‘돌봄 대상’으로서 해주는/시키는 대로 보살핌과 관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현실이고요. 그렇다보니 ‘좋은 돌봄’에 대한 경험보다는 오염된 돌봄, 어긋난 돌봄을 더 많이 겪어온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청소년인권운동에서는 그동안 ‘돌봄’이라는 말을 일부러 잘 안 쓰기도 했는데요. 어쩌면 이런 모습도 우리 현장에서의 ‘돌봄 혐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봄 현장의 돌봄혐오, 취약성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호연 활동가가 진행한 강의에서는 돌봄이라는 말이 여러 현장에서 어떻게 쓰이고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학교, 병원, 다양한 복지시설 등 많은 돌봄 현장에서 돌봄/보호가 자율성/주체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야기되는 사례를 짚으며 존엄성, 취약성, 그리고 돌봄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도의 의존과 독립성, 자율성과 취약성을 경험한다. 오직 독립과 자율만을 인간 삶의 본질로 가정하는 정치 질서는 그로 인해 인간 경험의 상당 부분을 놓치고 있으며 어떻게든 이 점을 다른 곳에 숨겨야 했다. 예를 들어, 그러한 생각은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했다.” (조안 트론토)


이 문장을 보면서 몇 년 전에 들에서 함께했던 몽실팀 활동이 떠올랐습니다. 몽실팀은 ‘청소년자립지원사업 자몽’과 동행하며 사업에 참여하는 기관/모임 곁에서 함께하는 활동이었는데, 당시에 처음 활동에 결합하면서 “나도 자립을 못했는데 자립 지원을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생각해보면 이 말은 온전하고 완벽한 자립(독립적 삶)이라는 게 있고, 그런 상태를 목표로 하거나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율성과 취약성, 돌보는 자와 의존하는 자의 구분법도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립은 없다(2019, 인권교육센터 들 씀)’는 말처럼 세상이 말하는 자립의 개념은 허상이기도 하고, 취약성이나 의존성을 숨겨야 하는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취약성과 의존성을 숨겨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미숙하고 부족한 점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며 자기 혐오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취약성을 혐오하고 부정하지 않는 사회일 때 어린이·청소년과 같은 ‘취약한’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존엄을 긍정하고 차별에도 함께 맞설 수 있지 않을까요?


‘취약성’이라는 말의 어원도 흥미로웠습니다. 라틴어 동사 vulnerare(상처를 입히다, 상하게 하다), 명사 vulnus(상처)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상처 이외에도 손상, 불안정성, 유한성, 연약함과 같은 의미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그러고보면 상처와 고통을 완벽히 제거하거나 피할 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상처와 흉터가 살아온 흔적이 되듯이, 취약성도 인간의 몸과 삶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돌봄이 비가시화되고, 잘 논의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취약성도 쉽게 가려지고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활동하는 지음에서는 올해 들어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여 “노키즈존은 차별이다” 캠페인을 진행 중입니다. 의외로 노키즈존에 대한 실태 파악이 잘 안 되어 있다는 점을 아시나요? 그래서 캠페인을 통해 먼저 우리 사회의 노키즈존 현황, 가게마다 다른 기준이나 이유, 종류 등을 조사하고, 제보를 통해 경험과 사례를 모으고 있습니다. 노키즈존을 둘러싼 여러 논란과 담론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논리 중에는 시끄러운 소리, 울음소리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말도 있고, ‘똥기저귀를 버리고 가더라’는 사례도 한번씩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돌봄 혐오를 반영하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울음소리, 시끄러운 소리 모두 돌봄을 요청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똥이나 치우는 일’, ‘나는 똥기저귀 가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똥, 분비물, 더러움에 대한 거부감과 그로 인한 혐오와도 연결됩니다.


<돌보는 질문, 질문하는 돌봄> 전체 4강의 후기를 다 담지는 못했지만,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새삼스럽게도 계속 ‘연습’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생각의 전환과 대화를 돕는 질문을 이어가는 것도, 점점 퍼져가거나 이미 스며들어 있는 우리 안의 혐오들에 맞서는 것도 계속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연습은 나홀로, 알아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같이 모여서 공부하고 상의할 수 있는 자리를 꾸준히 여는 ‘들’이 있어서 참 좋고, 다행입니다. 사실 저는 돌봄을 우리 활동과 삶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리고 마주하는 게, 흥미롭기도 하지만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도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와 감정들이 뒤범벅된’ 돌봄의 서사를 함께 엮어가는 일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함께해요!

– 글쓴이: 난다 (활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