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조직문화에 ‘돌봄’을 기입해야 하는 이유

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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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이후 열렸던 광장의 인사법을 따라본다면, 저는 보행자 교통사고 후유증의 여파로 원인을 뚜렷이 알 수 없는 신경통에 붙들려있는 인권교육활동가입니다. 오랫동안 ‘들’에서 상임 활동을 했었고, 다시 돌아온 올해, 본격적인 출근을 2주 앞둔 상황에서 교통사고를 겪었습니다. 가벼운 사고이길 바랐던 마음과 달리 증상이 하나둘 추가되더니 결국은 며칠 제대로 출근해보지도 못한 채 병가를 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입․퇴원을 하고 난 후에도 통원 치료는 계속되었고,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저의 시간을 배치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글로만 읽었던 온갖 질병과 통증에 관한 ‘고통 선배’들의 이야기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덜 아플 때도, 더 아플 때도 있는 상태로 여전히 ‘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맺고 있는 일-관계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과업을 해내고 있습니다. 취약성, 돌봄 관계, 관계적 자율성과 같은 돌봄 이론의 핵심 개념들이 제 몸을 통과하여 현현하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통증을 달고 사는 삶이 건네오는 성찰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이유는 ‘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조직문화의 자장 안에서 제가 돌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갓 들어온 신입 직원이 2주 동안 병가부터 쓸 수 있는 조직이 얼마나 될까요. 아픈 사람의 공백만큼 보태어지는 업무를 흔쾌히 나누어 맡는 동료 관계를 갖춘 조직 역시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이 문화를 지탱해온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난 6개월을 함께 버텨준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이 제 안에 뽀얗게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마움’의 토대를 언어화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마침, 한 인권단체로부터 조직문화 워크숍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동료가 되고 싶은가?

워크숍을 요청한 담당 활동가와 기획 회의를 가진 후, 조직 구성원이 가진 고민을 미리 파악하여 워크숍을 준비할 수 있도록 사전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직 내 전반적인 일 관계와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 위주로 문항을 설계했고, 곧 답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누적된 고민과 그에 따른 피로감이 느껴지는 응답들이 꽤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더 나은 관계와 조직문화를 만들고 싶은 의지가 담겨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동료가 되고 싶은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서로가 바라는 조직문화가 그려지곤 합니다. 탐구의 과정을 돕기 위하여 설문 분석을 바탕으로 ‘자치, 협력, 돌봄, 인정, 갈등, 안전(불편함)’ 6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구성원들의 고민을 키워드에 비추어 다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돌봄: 보이지 않는 심장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챙기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 노동을 ‘고르게’ 수행한다. 조직 내 보살핌이나 돌봄의 문제를 성별(성역할), 성격, 기질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노동’의 문제로 접근한다.”
– 움직이는청소년센터 엑시트X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조직문화 원칙 中


“서구 사상에서도 돌봄은 수백 년간 명백하게 비가시화되어왔다. (…) 가정에서 여성은 경쟁이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이타심에 의해, 합리성이 아니라 감수성에 의해, 계산이 아니라 친절함에 의해 동기부여 되리라 여겨졌다. (..)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지적했듯, 남성의 노동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따른다고 여겨졌다면 여성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 심장’의 작동을 따른다고 여겨졌다. 돌봄은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자연스럽고 도덕적인 것”으로 이야기 되었으며, “따라서 18세기 경제학이 이해한 좁은 의미의 노동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메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제가 가장 다루고 싶었던 키워드는 ‘돌봄’이었습니다. 제가 한동안 일했었던 엑시트X자립팸 조직문화 원칙을 마중물 삼아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동료에게 안부를 묻거나 관계를 유지·조율하기 위한 노동이 우리 조직에서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메들린 번팅이 <사랑의 노동>에서 언급했듯이 돌봄은 ‘보이지 않는 심장’의 작동에 따른다고 흔히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은 인식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거나, 인식되더라도 자연화되기 쉽습니다. 돌봄을 성별, 성격, 기질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선택하는 태도이자 ‘의식적으로’ 고르게 나누어야 할 노동으로 대하고,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봄이 일어나지 않는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이 노동을 별로 하고 싶지 않다거나, 가치가 낮다고 여기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묵묵히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나는 그 수혜를 ‘자연스럽게’ 입고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아픈 동료와 함께 일하는 방법

사전 설문조사에 “아픈 동료와 어떻게 함께 일해야 할까요?”라고 고민을 적어준 참여자가 있었습니다. 마주한 질문 앞에서, 지금의 저로서 내어놓을 수 있는 대답을 차분히 전하고 싶었습니다. 통증(질병)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달아나려 애써도 달라붙곤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면, 당혹감, 무력감, 죄책감이 공존하는 통증의 시간을 아픈 사람은, 조직은 어떻게 받아안아야 하는지 ‘들’에서의 저의 경험을 떠올리며 몇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정돈하였습니다.


조직도, 아픈 사람도 적응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를 성찰적 체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원점으로 되돌릴 수도, 일순간 제거할 수도 없는 통증 상태를 당분간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부합한 활동 리듬을 비틀거리며 함께 찾아가야 합니다. 재정이 열악하고, 일할 사람은 적고, 할 일은 많은 인권단체에서 당장 건너뛸 수 없는 조직의 한계는 있게 마련입니다. 당위적이고 모호한 배려보다는 구체적이고, 기민한 소통과 조율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한정된 조건 속에서 최대한 함께 해낼 방안을 충분히 논의할 수 있어야 아픈 사람도,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도 ‘멘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해녀학교에서 맨 처음 가르치는 것이 자기 ‘숨의 길’이라고 했다. (…)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안다.’와 달리 ‘숨의 길이를 안다.’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숨의 길이를 모른 채 물속에 뛰어들면, 내가 자신을 잘 몰라서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숨의 길이를 알면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 아는 것이 나를 살리고 돌보게 한다. (…) 내 한계인 ‘1분의 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 된다.” (엄기호, <공부, 공부>)


아픈 사람은 달라진 몸에 적응하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조직의 구성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엄기호가 <공부, 공부>에서 언급한 해녀학교의 가르침이 불현듯 생각나 일부 구절을 참여자들과 공유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통증을 겪고 있는 몸을 극복해야 할 한계로 설정하고, 더 빠른 속도로 많은 일을 해내던 ‘과거의 나’를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치료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숨의 길이’를 알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역량을 쌓는다는 관점에서 조직 내 관계와 활동을 바라보니, 내가 더 적극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몫(권한과 책임의 통합)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일방적으로 상황을 내맡겨두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전과 같은 양의 일을 소화할 수 없다면, 일의 분배를 좀 더 세분화하여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조절할 수도 있습니다. 통증의 변덕으로 인해 맡은 일을 계획에 맞춰 수행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면, 조직적 결정과 약속의 무게를 기억하며 책임 있게 그 일을 내려놓을 필요도 있습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만

이 모든 소통과 조율에는 몸과 마음의 품이 듭니다. 특히 질병권이 구조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것을 권리에 가깝게 실현해내는 것은 결국 동료들의 추가적인 노동과 고군분투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도, 동료도 양가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픈 사람은 미안할 이유가 없는데 한없이 미안하고, 동료들은 마땅히 해야 할 몫인 걸 알지만 피로가 어깨에 두텁게 쌓입니다.


제가 잠정적으로 택한 윤리적 태도는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움 전하기’입니다. ‘미안하다’는 언명은 ‘당신에게 미안함을 초래한 그 행동을 줄여 보겠다’라는 약속을 내포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프다’와 ‘미안하다’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고, 아픈 상태를 줄이는 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결과적으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저에게 ‘고맙다’는 표현은 일종의 돌봄 선언입니다. ‘당신의 그 행위가 나를 살렸으므로 당신에게 혹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그와 같은 행위를 갚아 나가겠다’라는 다짐으로 읽힙니다. 나의 아픈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달라진 나와 기꺼이 일하기를 선택한 동료들에겐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립니다.


조직문화에 돌봄을 기입하는 일은 어쩌면 무척 피곤한 일입니다. 또한, 조직문화의 변화로 조직에서 발생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고 살리는 노동을 한 뒤에 찾아오는, 노곤한 고양감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돌봄을 매개로 조직에 기입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했던 한 여성 노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돌보는 조직문화를 통해 팀워크를 빚어갈 때 우리는 “몸은 고되지만, 영혼은 편한” 운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글쓴이: 한낱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