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 짓는 교육] 나의 퀴어한 삶에서, 어린이의 삶을 다시 만나다

2026-08-24

아동양육시설의 종사자 50여 명과 ‘아동 인권’을 주제로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참여 인원이 많아 일주일 간격을 두고 두 차례에 나누어 만났습니다.
어린이의 삶을 지원하는 일을 하다 보면 즐겁고, ‘내가 이 일을 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어린이를 만나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번 교육에서는 그런 순간을 떠올려보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린이와의 관계 안에서 인권을 옹호하고 지지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단순히 ‘문제행동’으로 규정하기보다 그 행동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여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장면을 떠올리고, 그 행동의 맥락을 살펴보며 ‘사람은 어떨 때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가’, ‘그 행동을 통해 어떤 바람이나 욕구를 표현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 이야기 중 한 참여자가 이런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기분 나쁘면 대꾸도 안 해요. 문을 쾅 닫고 가버려요. 어떨 때는 욕설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 이야기를 가지고 모둠토론을 하던 중 한 참여자가 툭 내뱉듯 말했습니다.
“집에 가고 싶은가 보지.”
그리고 “나 여기 살기 싫어요, 이런 마음 아닐까?”라며 피식 웃었습니다. 그 말을 듣던 다른 참여자도 함께 웃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물론 그 말은 어린이의 행동을 이해해보려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추측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 여기 살기 싫어요’라는 마음은 정말 그렇게 쉽게 말하고 웃어도 되는 마음일까. 어린이에게는 자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살아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원가정을 떠나 시설에서 살아가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어린이가 “집에 가고 싶다”거나 “여기 살기 싫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쉽게 짐작하거나 웃어넘길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오래,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마음이겠지요.
교육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록 이 장면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른 참여자들과 같은 내용의 두 번째 교육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육에서 나온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면서, 이번에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소수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전국 퀴~어! 자랑대회’입니다.
“정상성을 벗어난 나의 퀴어한 삶! 나만의 소수성을 자랑해주세요.”
처음 참여자들의 표정에는 ‘나는 그런 게 없는데?’라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진행하는 제가 먼저 자랑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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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가지 않는 초등학생’, ‘나이 어린 엄마’, ‘술을 좋아하는 교인’, ‘늦깎이 학생’, ‘돌아온 싱글’. 각각의 키워드로 제 삶을 ‘자랑’했습니다.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하나하나의 삶에는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여러분도 정상성을 벗어나본 경험이 있으시지요?”
어딘가 모르게 미소를 띠고 있는 참여자의 이야기부터 초대해보았습니다.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여자 어린이였다는 자랑을 해주었습니다. 여자애가 무슨 축구를 좋아하냐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축구를 하기 위해 애썼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참여자들은 그 이야기에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 뒤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이어가니,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일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저는 가출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라며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동생들의 밥을 차리고 설거지와 빨래를 하며 가족을 돌보았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습니다. 가족 돌봄이 싫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왔다는 이야기를 덤덤히 들려주었습니다. 참여자가 참여자를 초대하니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자랑대회’라는 이름 덕분이었을까요. 어쩌면 삶의 어려움과 고통이 섞여 있는 경험들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초대받은 다른 참여자들도 이어서 자신만의 퀴어함을 자랑했습니다.
“저도 사회복지사 공부를 50대가 넘어서 시작했어요.”, “저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어요.”, “저도 선생님처럼 이혼을 했습니다.”, “저는 수녀 같지 않은 수녀입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은 기관에서 매일 만나는 사이지만 몰랐다는,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새롭게 보인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처음 ‘퀴어한 존재’라도 했을 때는 마치 ‘나는 아니야~’하는 표정이었는데 ‘정상’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 본 경험을 말하다 보니 ‘나만의 고유한 인생’으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너나 나나 모두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만큼의 인생 서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서로에 대한 인정이 한눈에 느껴집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는 누구에게든 내가 모르는 삶의 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할 때보다 모른다고 생각할 때 더 존중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 사람이 시설에서 살고 있는, 내가 매일 만나는 어린이라 할지라도요. 두 번째는 고통을 공감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아는 척에 그칠 수 밖에 없겠지요.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위치로 잠시나마 이동해야 보이고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교차되는 차별의 논리를 발견하고 소수성을 가진 존재로서 만날 때 비로소 차별받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차별받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정상으로 정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가족은 하나의 모습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정상가족’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가족은 설명해야 하거나 문제가 있는 가족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 시설에서는 종사자에게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가족’만을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여기는 사회적 기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나며 경험하는 괴리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괴리감을 유지하는 일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첫 교육에서 만났던 어린이의 “대꾸하지 않고, 문을 쾅 닫고, 욕설을 하는” 행동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일에 화가 났다는 표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정말로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그 어떤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우리가 너무 쉽게 해석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어떻게 대하는 것이 어린이를 존중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결국 어린이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것은 어린이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마음 앞에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하려는 태도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이가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해결사가 되어 주려고 하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에 곁에 있기를 선택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삶에서 경험되는 고통은 해결되기까지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여정에 함께 하는 존재가 있다면, 고통이 아니라 다른 기억으로 남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 글쓴이 : 지나(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