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 짓는 교육] 차별과 혐오가 짙은 사회일수록 ‘좋은’ 이야기를

2026-09-02

[들이 짓는 교육] 차별과 혐오가 짙은 사회일수록 ‘좋은’ 이야기를

- 거대한 우울에 맞서 인권교육이 해왔고, 해낼 수 있는 것



인권을 조롱하는 드라마가 교육 정책의 모티브가 되고, ‘저항권’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집회가 도심에서 버젓이 열리는 혼돈의 시대다. 이슈를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 분리와 배제, 혐오의 언어가 일상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이제는 청소년, 성소수자 등 특정 집단의 인권을 지연시킴으로써 사실상 부인하는 ‘나중에’ 정치조차 사라진 듯하다. 동등한 인간임을 부정하고, 공동체와 사회로부터 추방하자는 주장이 거침없이 등장하고 있다. 극단으로 치달은 구조적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있어 능력주의를 넘어 ‘우생 사회’까지 거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암담하다. 그리고 이 암담한 시대에 나와 동료들이 쥐고 있는 도구는 한낱 ‘인권교육’이다. 시대의 격랑 앞에서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이 도구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 해볼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 상태를 희망이라고 부른다면, 인권교육이 지탱할 수 있는 한 줌의 희망이 아직은 남아있다고 나는 믿는다. 믿어야 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고, 활동을 이어갈수록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인권교육의 가장 강력한 유용함은 이야기의 힘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시대일수록 구석구석 사람을 찾아가고, 곤경에 처한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야기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날라야 한다. ‘이야기 보부상’으로서 인권교육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판단인데, 절망에 빠져들수록 우리가 기댈 수 있고, 기대고 싶은 것이 바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어떤 이야기를 다룰 것인가


최근 한 지역에서 장애인권교육 강사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장애인권교육은 무엇을 하는 시간인가’에 대한 내용을 구성하면서 '인간'으로서 한 존재의 서사와 맥락에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 참여자들과 꼭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나 시설 등의 현장에서 쉽게 ‘골칫거리’로 취급되는 존재들, 마치 이 존재만 사라지면 모두가 평안해질 것마냥 ‘이물질’처럼 여겨지는 존재를 교육 안에 소환하여 우회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 존재와 세상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왜 이렇게까지 이 존재를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인가’, ‘갈등 상황에 대한 종결책으로서 이 존재에 대한 분리/배제를 열망하게 되는 맥락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고유한 서사와 맥락을 빼앗긴 채 극단적으로 사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화’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상원 저서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위의 목표를 위해 내가 선택한 이야기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반학교 ‘특수’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노르웨이에서 장애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윤상원의 고군분투기다. 2023년 교육공동체 벗이 펴낸 그의 책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평등한 분리 교육은 없다>에는 10여 년 넘게 학교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1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시도했던 그의 무수한 교육적 도전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민재의 경우 하루에도 수십번, 교실 앞 복도를 지나다가, 급식을 먹다가, 또는 수업을 듣다가도 주위 친구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 새끼가, 지금 나 욕했냐?"라며 욕설을 내뱉곤했다. 이럴 때면 주먹으로 책상을 치기도 하고 지나가는 친구들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친구들이 즐거워할 때, 고개 숙여 필기할 때, 계단을 오르는 민재를 도와주기 위해 손을 내밀 때와 같이 전혀 화가 나지 않을 상황에서도 화를 내곤 했다. 그런 민재에게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중간 수준 이상의 망상 증세를 보이는 중증 조현병으로 진단하고 항정신병 약물을 강하게 처방했고, 민재는 언제나 잠에 취한 채 학교 일과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위의 책, 147쪽)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로 나아갈지 가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 민재를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가해자’로, 예측불가능한 도전행동으로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부적응자’로 분류할 때 모든 문제의 원인은 민재로 귀속된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 민재의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너무도 쉽게 강한 약물 처방이 이루어진다. 약물의 본래 기능은 증상을 가진 사람의 삶/일상의 지속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위 단락에서 약물 처방은 민재를 잠의 세계로 떠밀어버림으로써 민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삶/일상을 지속시키려는 기획이다. 그러므로 사실상의 분리조치다.



모둠활동 결과지



“이유없이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그동안 민재가 학교 생활에서 어떤 관계와 상황를 경험했는지가 중요하다.”, “학교에 와서 잠만 자는 상태를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등과 같은 참여자의 분석이 덧대어지며 우리의 이야기는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교육이란 무엇이며, 학교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같은 현상(증상)을 두고도 약물 처방 비율이 국가마다 현격히 다르다는 점, 점진적으로 약물 처방 비율을 줄여나간 국가의 공통점은 학교사회 혹은 교실 학습 환경에 대한 변화에 집중했다는 점을 통계 정보와 함께 제시했다. 결국, 어떤 교육 철학을 가꾸어가는 사회인지에 따라 갈림길에서의 선택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교육의 의료화(손쉬운 약물 처방과 분리조치)를 통해 우리가 잃은 교육적 가치는 무엇인가. 관련하여 윤상원의 이야기를 보태었다.   


“학교 사회가 권유하는 약물이 발달장애라 명명된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서로 앎’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 한 사람의 행위를 개인 내 질병으로 쉽게 환원시키는 것은 그 행위를 학교나 교실 환경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반성하며 변화를 모색할 가능성의 문을 닫는다.(…) 약물은 민재를 잠재움으로써 망상 증세를 일시적으로 소거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민재가 망상 증세를 가지고 어떻게 타인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인 삶의 지혜를 얻을 기회는 박탈하였다.” (위의 책, 142~147쪽 일부)


여기까지만 진행했어도 하나의 완결된 사례토론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민재라는 ‘사람’이 학교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행동’의 이면에 숨어있는 서사와 맥락이 무엇일지 질문하며 조금 더 인물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른다


“민재는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다른 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집단 폭력을 당했다. 민재에게 학교의 경험은 자신을 향한 온갖 욕설과 폭력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폭력의 기억들이 순간순간 떠오를 때면 조그만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오해하며 즉각적으로 대응하게끔 만드는 것은 아닐까. 민재가 ‘괴물’이 아니라 학교 사회라는 괴물이 민재를 괴물로 만든 것이다. 현재 민재의 욕설과 분노가 민재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원에는 민재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맞아야 했던 과거의 아픈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 150쪽)


윤상원의 해석을 통과한 민재의 삶이 책 속에 위와 같이 담겨있다. 그는 ‘문제행동’의 뿌리를 탐색함으로써 민재가 여전히 학교사회와 연결된 내부자이며, ‘괴물’로 오인된 피해자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치열한 이해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윤상원은 교사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 또한 회복한다. 학생의 행동을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역할에 충실할수록 자신 또한 분노가 커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방식을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 민재의 표정에서 조그마한 불꽃이 튈 것 같으면 바로 그 상황이 민재를 위협하는 상황이 아님을 알리는 것과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놀림의 표현에 대해 유머로 응대하기는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과거에 남겨진 불씨가 현재로 튀지 않게 함으로써 현재 상황에 맞는 적응 행동을 위한 생각의 자원이 민재에게도 쌓이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그렇게 우리 서로가 (불 난 곳에) 찬물 끼얹기를 통해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의 책, 153쪽)


나와 마주 선 취약한 존재가 어떤 서사를 품은 채 ‘현재’에 당도한 것인지를 이해할 때, 그렇다면 나는 이 존재와 함께 ‘앞으로’ 어떤 서사를 써내려 갈 것인지 또한 질문할 수 있다. 미래는 충실히 살아낸  오늘이 빚어내는 결과다. 윤상원이 ‘성장’이라고 부르는 하루하루의 도전이 쌓여 ‘고통과 폭력의 서사’는 비로소 ‘우정과 배움의 서사’로 전환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참여 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참여자가 자신 역시 ‘저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났던 순간들이 있다며 솔직한 고백을 나눠주셨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고 계신 분이었는데, 학교도 여전히 통합교육 지원이 부족한 형편이지만 어린이집은 지원이 전무한 상황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어린이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 다른 어린이를 돌보고 있으면 어느새 사건이 터지는데, 그렇다고 장애가 있는 어린이만 신경 쓸 수도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살길’을 찾기 위해 장애인권교육 강사양성 과정을 신청하신 거였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계속 놓이다 보면, 미워하고 싶지 않아도 미워하게 되는 양가적인 마음에 누구나 휩싸일 수 있다. 여러 현장의 실무자/교사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취약한 존재를 마주하지만, 한편 제도의 모순과 공백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자칫 존재에 대한 혐오를 갖기도 쉬운 위치다. 사람의 마음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모순된, 복수의 ‘나’가 얽히고 뭉쳐 자아를 형성한다. ‘연민(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나’와 ‘혐오하는 나’ 사이의 내적 갈등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혐오해선 안된다’는 단호하고 강력한 언설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러한 접근은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을 숨기거나, 더욱 꼬이게 만든다.    


민재와 그 곁에 선 윤상원의 이야기를 나눴던 순간이 이날의 교육 중 몰입도가 가장 높은 순간이었다. 참여자 중엔 장애인 시설이나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실무자/교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날 건넨 이야기가 현장에 곧장 적용할 수 있는 직접적 ‘해법’으로 가닿은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민하는 나’에게 힘이 되어줄 근거를 얻고,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야 할 이유를 조금 더 발견한 시간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당장 상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나의 힘듦과 버팀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조금 더 의지를 끌어낸다.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로 함께 버텨 낼 곁을 조직한다. 나는 이것이 현장 층위에서 인권교육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혐오 대응 역량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못난 마음도 ‘안전하게‘ 드러내며 적극적으로 전환을 모의할 수 있는 자리가 곳곳에서 열려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버텨내는 시간 동안 현장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는 진정한 버팀목으로서 구조적, 제도적 전환을 사회가 이뤄내야 한다.        


삶도, 싸움도 결국은 이야기로 남는다


요즘 교육을 하며 참여자들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 있다. 앞으로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써내려가고 싶은지, 그리하여 나의 삶이 어떤 이야기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이때 좋은 참조점이 되는 것이 바로 구로중학교 ‘각색모임’ 이야기다. 삶도, 싸움도 중요한 장면은 모두 갈림길에서 시작된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이 우울과 절망에 휩싸일수록,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갈구한다. 이야기에 기대어 고된 시간을 건너 희망의 출구를 발견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각색모임은 이주배경 학생이 많아진 학교에서 공존의 교실을 만들고 싶었던 교사 두 명의 공부 모임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주민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는 지역사회 네트워크 역할을 하고 있다. 2025년 7월, 혐중세력이 대림동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 각색모임을 비롯한 연대자들이 혐오에 대항하여 함께 싸운 이야기를 나는 교육에서 자주 소개한다. 이 당시 ‘최전선에 선 구로중학교의 분투기’2를 기사로 쓴 시사인 김영화 기자는 이들의 싸움을  ‘혐오의 역사’를 ‘혐오 대응의 역사’로 바꾼 중요한 실천으로 다룬다.  


1년 뒤인 2026년 7월, 각색모임 교사 한채민은 이주민 혐오 대항 주간 <모두의 공론장> 토론회에서 “고요한 교실 안에 자꾸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생생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현실 속 진짜 이야기들을 들고 와 얼굴을 맞대고 학생들과 어지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고군분투의 연속인 현장에서 교사 한채민이 혐오의 강을 건너가는 방식일 것이다. 세상 곳곳에서 각양각색으로 빛날 한채민/들의 이야기를 길어내어 멀리멀리 퍼뜨리는 것, 이것은 인권교육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해낼 수 있는 최적의 연대일 것이다. 고 길원옥 님의 말씀처럼 좋은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 ‘돌림 노래’가 되어 떠돌고, 떠돌아야 하므로.


“좋은 말은 입 속에 가두어 두면 안 돼, 해야 해.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다른 데 가서 전하게.

좋은 말은 돌림 노래가 되어 떠돌고, 떠돌아야 해.

나쁜 말은 입 속에 가두어 둬, 소금처럼 녹아 없어질 때까지”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 길원옥 구술 

(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현대문학, 2018, 97쪽)



글쓴이 | 한낱(상임활동가)



1) 위 책에서 윤상원은 ‘장애 학생’이 아닌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특정 손상(defect)을 지닌 학생들이 ‘할 수 없게’ 설계된 학교에서 ‘할 수 없음’을 뜻하는 ‘장애(disability)’라는 명명(label)은 기존 학교 환경 조건에 의해 그 존재에게 부여된 것이지 본래 그 존재의 속성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위의 책, 6쪽)

2) 김영화 기자, '교문 앞까지 찾아온 혐오… 최전선에 선 구로중학교의 분투기', 시사인, 2025.11.18.